계약
Lashme
C o n t r a c t
with Abigail
'처음’의 순간들.
내가 은근한 오만에 빠져 자신만의 격식을 차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마음 가는 대로 웃는 법을 몰라 진중하게만 말하고 행동했었다. 그게 당연한 일인 줄만 알았다. 감정을 숨기는 게 언제나 최선의 선택이라 여겼었으니까. 그러나 떠오르는 대로, 감정에 따라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일. 아이마냥 웃기도 하고, 망설이기도 하고, 숨기도 하고. 그 사소한 ‘처음’이 모여 조금은 달라진 자신을 만들어냈다. 다 당신 덕분이었다. 아비게일. 그런 당신이 먼저 계약을 하자고 선뜻 말해주었다.
망설일 이유가 하나 없었다.
계약. 계약이라는 건 맹약보다는 덜하지만 서로에게 가볍게든, 무겁게든 종속된다는 걸 의미한다. 더 이상 남이 아니게 된다는 의미였다. 그 무게가 두려워 한 번도 도전해 본 적이 없었지만 지금 내 앞의 상대가 당신이였므로 믿고 나아가기로 했다. 이것 또한 당신과 쌓아올리는 처음이라고 생각하니 조금씩 긴장이 풀렸다. 아비. 아비게일. 조용히 당신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 어쩌면 나는 나이만 먹은 어린 아이인지도 모른단다. ”
똑똑한 척 하는, 나이 천 살이나 먹은 어린 아이. 덧붙이곤 당신이 조사했을 당시 잡아주었던 쪽을 손을 두 손을 잡아선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러다 한 손을 당신의 흉부 쪽으로 가져가 지긋 눌렀다. 심장이 뛰는 곳. 당신의 심장 박동이 피부를 타고 흘러 들어왔다. 쿵, 쿵, 쿵. 마치 마법주문처럼 잔잔히 그 고동에 스며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천천히 당신의 흐름을 새기기 시작했다. 심장의 움직임, 숨결의 움직임, 고유의 흐름. 나는 나의 방식으로 당신을 하나도 빠짐없이 읽었다.
“ 나는…본체도 자그맣고, 제대로 싸울 줄도 몰라. 전투에 관한 지식은 전부 이론일 뿐이고 실제로 전장 경험도 없어서, 중요한 순간에 좋지 못한 판단을 내려버릴지도 모른단다. 겁주려는 게 아니야. 그저… 사실을 말하면 네가 조금 더 편할 것 같아서. 내 속성은 오로지 치유를 위해서만 쓰이지. 힘을 불어넣고, 기운을 차리게 해주고. 네가 이 사실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구나. 네게 나를 맞출 수 없다는 게 미안할 따름이야.
..그래도, 아비, 최선을 다할게.
나는 강하지 않지만 너를 강하게 만들어 줄 수는 있단다. “
천천히 당신의 몸에 자신의 문양을 새기며, 미소지어 보였다.
함께 싸우자, 아비.
우리가 싸우고 승리해서 돌아올 때마다 꽃들의 이름을 알려줄게.
그러기로, 약속했었으니까.